커피플레이션,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현대인의 일상에서 커피는 공기나 물처럼 당연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인의 연간 1인당 커피 소비량은 405잔으로, 세계 평균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매일 한두 잔의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하거나 버티기 힘든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 '필수품' 커피의 미래에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바로 '커피플레이션(Coffee-flation)', 즉 커피 가격 급등 현상이다.
작년부터 커피 전문점은 물론 저가 프랜차이즈, 심지어 커피믹스와 편의점 커피까지 가격 인상 행렬에 동참했다
스타벅스는 5개월 사이 세 차례나 가격을 올렸고, 동서식품 같은 인스턴트 커피 강자도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당분간 커피 가격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며, 더 나아가 커피 맛이 변하거나(밍밍해지거나) 아예 커피를 마시기 어려워지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암울한 예측까지 나온다
대체 무엇이 우리를 커피 없는 세상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그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쳐 본다.
커피 가격, 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는가? (생산 문제)
커피 가격 급등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당연하게도 원두 가격의 폭등이다.
뉴욕 국제 상품 거래소 기준, 커피 원두 가격은 작년 한 해에만 70% 이상 치솟았다
우리가 주로 소비하는 커피 원두는 크게 아라비카(Arabica)와 로부스타(Robusta) 두 종류로 나뉜다.
풍부한 맛과 향으로 고급 커피 시장을 장악한 아라비카는 전 세계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인기 품종이다
작년 12월, 이 아라비카 원두 가격은 1977년 이후 47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편,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재배가 쉬워 인스턴트 커피나 저가 커피에 주로 쓰이는 로부스타(생산량 30%)는 보통 가격 변동 폭이 크지 않다
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무려 80% 넘게 가격이 폭등하며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원두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른 것일까?
글로벌 커피 업계에는 "브라질이 재채기를 하면 커피 세계가 감기에 걸린다"는 격언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전체 생산량의 1/3 차지)인 브라질의 농사 상황이 전 세계 커피 가격을 좌우한다는 의미다
이번 가격 폭등 역시 브라질의 '재채기'가 결정적이었다.
브라질의 연이은 악재: 서리와 가뭄
2021년 7월, 브라질의 주요 커피 농장 지대에 기록적인 서리가 내렸다
특히 아라비카 품종은 서리에 매우 취약하여 잎사귀가 말라 죽거나 심하면 나무 전체가 고사하기도 한다
이때 내린 강한 서리로 인해 브라질 전체 커피 생산량의 약 20%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커피 나무는 새로 심어 수확하기까지 3~4년이 걸리기 때문에, 한번 큰 서리 피해를 보면 그 여파는 수년간 지속되며 국제 커피 가격을 뒤흔든다
역사적으로도 1975년 브라질에 닥친 최악의 혹한(일명 '검은 서리 사건')은 당시 재배 중이던 15억 그루 중 절반 이상을 죽게 만들었고, 그 여파가 절정에 달했던 1977년 커피 원두 가격은 이후 47년간 깨지지 않는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의 가격 급등 역시 2021년 서리의 후폭풍인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2024년에는 브라질 전역에 극심한 가뭄까지 덮쳤다.
서리에 이어 가뭄까지, 브라질은 4년 연속 커피 흉작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부스타 원두 최대 생산국인 베트남마저 작년에 가뭄과 폭우로 몸살을 앓았다.
주요 생산국의 연이은 작황 부진은 커피 가격 상승의 가장 근본적인 배경이다.
보이지 않는 손: 가격 폭등을 부추기는 요인들 (시장/정책 문제)
커피도 결국 농작물이니 자연재해에 따른 가격 변동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번 커피플레이션을 더욱 심화시킨 다른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물 시장의 투기 세력
글로벌 커피 가격은 실제 현물 거래 가격보다는 선물(Futures) 시장의 가격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선물은 미래 특정 시점에 정해진 가격으로 상품을 사고팔기로 약속하는 계약으로, 일종의 가격 지표 역할을 한다
원래 농산물 가격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투기 세력의 개입으로 오히려 가격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 자본이 가격 상승을 예상하고 베팅하면, 실제 수급 상황과 무관하게 가격이 더 가파르게 치솟는 경향이 있다
브라질의 흉작 소식이 전해지자, "커피 가격이 오르겠네"라고 판단한 투기 세력이 매수 포지션에 가세하면서 가격 상승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선물 가격이 바닥을 칠 때는 소규모 농장들이 인건비도 못 건지는 헐값에 원두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재기와 규제의 영향
가격 상승세에 기름을 부은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사재기'다
왜 사재기가 발생하는가?
흥미롭게도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 예고가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혹시 커피에도 높은 관세가 붙을지 모른다는 우려에 세계 최대 커피 수입국인 미국 구매자들이 앞다퉈 수입 시기를 앞당기고 물량을 확보했다는 분석이다
유럽 연합(EU)의 새로운 규제 역시 사재기를 부추기고 있다
EU는 환경 보호를 위해 '살림 벌채 규정'을 도입했는데, 이에 따라 유럽 시장에 커피를 공급하는 모든 기업은 해당 커피가 살림을 파괴하지 않고 생산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 증명 절차가 복잡하고 수입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유럽 국가들 역시 규제 적용 전에 서둘러 커피 재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커피의 미래: 밍밍하거나, 사라지거나? (기후변화와 대안)
단기적인 생산 차질과 시장 요인을 넘어, 커피의 미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가장 큰 그림자는 바로 '기후 변화'다
커피 재배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가진 지역을 '커피 벨트(Coffee Belt)'라고 부른다
특히 맛과 향이 뛰어난 아라비카 품종은 연평균 기온 18~21℃의 서늘한 고지대에서 주로 재배되는데,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이 커피 벨트 지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온 상승은 커피 열매가 제대로 열리지 않게 하거나, 나무가 각종 감염병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호주 기후 학회는 한 연구 보고서에서 현재 추세대로라면 2080년경 커피가 사실상 멸종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재배 조건이 까다로운 아라비카 품종은 멸종이 코앞에 와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2050년이면 현재 아라비카 재배지의 절반이 사라질 수 있다는 예측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커피 업계는 생존을 위한 대안 마련에 분주하다.
기후 변화와 질병에 강하면서도 기존 품종의 풍미를 유지하는 '하이브리드(잡종) 커피'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또한, 과거에는 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받았지만 재배가 용이한 품종들을 다시 발굴하여 개량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이 성공한다면 커피 가격의 급격한 변동성을 줄이고, 최악의 경우인 '커피 멸종' 시나리오를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 즐기는 커피의 맛과 향이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카페인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닌, 진정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미래에도 누릴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시점이다
자주 묻는 질문 (Q&A)
A
단기적으로는 생산량 회복, 투기 자본 이탈 등으로 변동성이 있을 수 있으나, 기후 변화라는 구조적 위협 때문에 장기적인 가격 상승 압력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A
완전한 멸종까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기후 변화로 재배 가능 지역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고 가격이 더 비싸질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품종 개량 연구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A
개인 소비자가 가격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공정 무역 커피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재배된 커피를 선택하는 등 윤리적 소비를 통해 장기적으로 생산 환경 개선에 기여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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